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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5대 왕인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활동을 펼치고, 왕위에 오른 후에는 여러 정책과 외교를 실시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한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와 업적, 평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광해군의 출생과 성장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로 위로는 친형 임해군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습니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 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습니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도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습니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조는 후궁 인빈 김 씨를 총애했기에 그녀의 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선조에게는 장성한 여러 왕자들이 있었으나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 등은 성격이 흉폭하여 불가하였고, 자질로 따지자면 광해군이 유력했습니다. 그러나 방계승통에 서얼이라는 열등감이 있었던 선조는 광해군이 정비에게서 나온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습니다. 1591년, 선조의 나이가 어느덧 40세에 이르자 대신들은 더 이상 후계문제를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세자책봉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논의 끝에 영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좌의정 정철 등은 함께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인의 영수 이산해는 이를 이용해 계략을 꾸몄습니다. 선조가 신성군을 영두에 두고 있음을 알았던 이산해는 이번기회에 지난번 기축옥사 (1589)로 동인들이 당한 것에 대한 보복과 더불어 정철과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이산해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동의 한 뒤, 인빈 김 씨의 오빠 김공량에게는 서인들이 신성군을 죽이려 한다고 은밀히 전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선조는 인빈 김 씨를 통해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산해는 병을 핑계 삼아 주청을 하기로 한 날에 경연에 불참하였습니다. 이산해가 계략을 꾸미는 줄도 모르고 정철은 경연 중에 선조에게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했습니다. 선조는 진노하며 정철을 파직시키고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이후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올리고 서인을 멀리하며 동인들을 가까이 두었습니다. 선조가 정철과 서인의 처결문제를 동인들과 의논을 할 때에 동인들은 의견이 갈려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과 칭찬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광해군의 왕위 즉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은 영창대군을 1613년 대북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서인으로 삼았고, 1618년에는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습니다. 이러한 정치 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에 의해 폐위당하였습니다.
광해군의 정치 활동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에는 여러 정책과 외교를 실시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금과의 전쟁 위기 상황에서 실리외교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위 옹립에 공이 컸던 대북 파의 반발로 당쟁에 휘말리고 말았으며, 이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광해군의 문화 활동
광해군은 서적의 간행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 선조실록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하였습니다. 또한 문인들을 장려했으며, 자신도 시와 문장을 쓰는 등 문화적인 면모도 갖추었습니다.
광해군의 폐위와 사망
서인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1623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습니다. 광해군 가족은 강화도로 유폐되었는데 폐세자 이질과 세자빈은 강화 서문 쪽에 안치되었고 광해군과 폐비 유 씨는 동문 쪽에 안치되었습니다. 이질은 강화에서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붙잡혔고, 자결을 명 받아 숙주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며, 세자빈도 자결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624년 폐비 유 씨도 사망하였고 광해군은 이후 제주도로 이배 되었다가 164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묘호는 광해군지묘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습니다.